1.
사이클이 돌아오면 태형은 끝없이 지민을 안았다. 사이클이 왔을 때만 지민은 유일하게 태형을 겁내지도 혐오하지도 않았다. 제가 먼저 다리를 벌리고, 박아달라며 매달리고, 좋다고 울었다. 사이클이 끝나면 한동안 자괴감에 시달리는 듯했지만 울혈이 가득한 몸으로 넋이 나가 앉아있는 모습도 제법 예뻐서,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줄 필요는 없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태형은 지민의 사이클을 기다렸지만 정작 지민은 주기가 돌아오면 그냥 죽고만 싶었다. 저를 안아달라 매달리는 제 모습이 끔찍했고, 제 안에 차있는 정액을 긁어내면서 또 임신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해야 했다. 아이를 낳는 건 제 약점을 태형의 손에 쥐어주는 것뿐이라는 걸 지민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태형이 제 욕구를 참아주는 것도 아니었으며, 지민에게 손찌검을 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민은 이미 셀 수 없는 유산과 두 번의 출산을 겪었고 태형은 아이를 그저 저를 맘대로 다루기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 아이를 낳았음에도 지민은 제 아이를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빼앗겼다. 아이는 다른 곳에서 키워졌고 지민은 태형을 통해서만 아이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끔씩 사진을 찍어오기도 했지만 그 사진 역시 지민을 맘대로 다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지민은 태형의 뜻대로 휘둘렸다.

태형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켰다. 창문을 다 막아놓은 탓에 오피스텔에는 인위적인 형광등 말고는 빛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지민은 혼자 있을 땐 늘 방에 불을 켜지 않았다. 박지민은 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려있던 지민은 방에 불이 들어와도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태형은 지민의 무심함이 익숙한 듯 제 겉옷을 벗어 걸어두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선물 가져왔는데. 안 볼 거야? 태형이 선물을 거론하자 지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지민은 서둘러 눈 앞에 보이는 사진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태형은 아직 안된다며 사진을 제 등 뒤로 숨겨버렸다.

" 왜 그래.."

그러지마. 오랜만이잖아. 제발. 태형아. 이러지마. 괴롭히지마. 예쁜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박지민을 더 몰아가 울려야할지 생각하던 태형은 지민의 말대로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순순히 사진을 넘겨주었다. 지민이 마지막으로 봤던 사진의 아이는 누워서 젖병을 물고 있었는데, 지금 아이는 혼자 서서 웃고 있었다. 태형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지민은 언제부턴가 또 울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태형은 한순간에 지민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았다. 사진이 찢어져 버릴까봐 힘을 줘보지도 못하고 순순히 사진을 뺏긴 지민은 사진을 돌려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태형을 올려다 보는 지민에게 태형은 하는 걸 보고 두고 가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씻고 오겠다며 태형이 욕실로 향하자마자 지민은 협탁 위에 놓인 사진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멋대로 만졌다간 저번처럼 사진을 다 태워버릴 것만 같아서 지민은 두 손을 맞잡고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사진을 눈에 담아놓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아주 가끔, 정말 가끔 태형이 가져다주는 사진 한 장이 지민이 가질 수 있는 전부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태형은 지민이 제 말을 듣지 않을 때면 다 태워버리곤 했다. 지민은 아이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지민이 아이의 이름을 물어봤던 날, 태형은 어차피 불러줄 수도 없을 텐데 알아서 뭐하겠냐고 비웃으며 대답해주지 않았다. 태형은 박지민과 아이를 만나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2.
지민아. 난 정말 너한테 잔인해지기 싫어. 이미 여러번 겪었잖아. 아직도 포기가 안돼? 태형은 제 발 밑에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우는 박지민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지민이 나가려고 했을 땐 지민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목줄을 매어두었다. 두 번째로 지민이 사라졌을 땐 지민의 가족들이 살던 집에 불을 질렀고, 지민의 첫 아이는 지민이 세 번째로 오피스텔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태형이 죽여 버렸다. 지민의 가족들은 집과 함께 다 사라져버렸고, 태어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아이는 제 아버지의 손에 죽었다. 지민은 또 이곳에서 나가려한 제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태형아,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내 다리 자를래? 자르고 싶어 했잖아. 그래도 돼. 잘라도 돼.  아기한테 그러지마. 죽이지 마. 내가 잠깐 미쳤어. 잘못했어. 정말이야. 잘못했어. 태형아.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다신 안그럴게요. 제발요. 다리, 다리 자르세요. 이제 안나갈거에요. 필요없어요. 자르셔도 돼요. 태형은 지민이 웃겼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아이가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차라리 제 다리를 자르라는 말이 저렇게 쉽게 나오나 싶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태형은 그러게 왜 멍청한 짓을 했냐고 물으며 웃었다.

잘못했다고 지민이 다 뭉개진 발음으로 빌었다. 입이 닳도록 잘못했단 말만 되풀이 하는 지민이 태형은 슬슬 지겨웠다. 태형은 어차피 아이를 죽일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지민아, 지민아 하고 몇번이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든 지민은 울어서 엉망인 얼굴로 태형을 올려다봤다. 아냐 이번엔 안 그럴 거야. 이번엔 나보다 너를 더 닮았더라고, 그리고 아무리 나라도 우리 아기한테 그렇게 나쁜 짓은 하기 싫잖아. 지민은 소름끼치는 이유에도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태형이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지민은 조금 진정한 듯 보였는데, 태형은 아직 지민을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 물었잖아. 왜 그랬어. "

왜 나가려고 했어. 태형은 웃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뺨을 만지자 지민은 벌벌 떨면서 그 큰 손에 제 뺨을 비볐다. 대답하기 싫어? 꼭 이럴 때만 애교를 부려. 그치? 이유는 많았다. 김태형이 싫었다. 그렇게 싫은 김태형을 매일 기다리는 것도 싫었고, 제 몸을 부술 듯이 안는 성관계도, 말을 안들을 때마다 쏟아지는 손찌검도, 가끔씩 팔목에 놓아주는 주사도, 창문하나 없는 곳에 갇혀있는 것도, 전부 싫었지만 지민은 태형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지민은 결국 잘못했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잘못했다고 울면서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김태형은 잔인했다.

지민이 대답을 회피한다는 걸 눈치 채고 부터 계속해서 이유를 물었고, 지민이 용서를 구하다 지쳐 쓰러지고 나서야 태형은 지민을 몰아붙이는 걸 그만두었다. 박지민이 자는 사이에 발목의 힘줄을 아예 끊어놓을까 싶었지만 태형은 안 그래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지민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어차피 지민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깨달을 때도 된 것 같은데, 그 많은 희생을 치뤄놓고도 지민은 아직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건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건지 생각하면서 태형은 대체 무슨 벌을 줘야할까 고민했다.




3.
" 어제 처음으로 혼자 걷더라고. "

금방 넘어져서 우는데 우는 얼굴이 너랑 똑같더라. 태형이 아이 얘기를 하기 시작하자 지민은 그제야 태형에게 관심을 조금 보이는 듯 싶었다. 밥은 왜 하나도 안 먹었어? 지민아. 니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없는 동안 계속 재워두고 포도당을 넣어주는 방법도 있어. 그렇게 있고 싶어? 내가 있을 때만 일어나 있을 수 있게 해줄까? 그건 싫잖아. 대화주제를 옮기자마자 다시 눈을 감아버린 지민을 보면서 태형은 화를 삭히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민아. 밥 먹어. 니가 계속 굶으면 니가 굶는 만큼 니 새끼도 굶길 거야. 어린 게 배고파서 울면 불쌍하잖아, 잘 먹어야지. 내일부턴 밥 먹을 거지? 태형의 말에 지민은 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알파는 저를 다루는 법을 끔찍할 만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같이 씻을까, 먼저 씻을래. 익숙한 태형의 말에 지민은 먼저 씻겠다며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지민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한참을 일어서지 못하고 앉아있는 지민을 보면서 역시 어젯밤은 많이 심했었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나가려 했던 걸 고려하면 적당한 수위의 벌이었다고 태형은 생각을 고쳤다. 겨우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꼴이 제법 안쓰러워 보여서 태형은 오늘은 좀 봐줘야겠다는, 곧 있으면 머릿속에서 사라질 별 의미 없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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