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침대 끝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병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지민의 눈은 벽에 걸린 시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10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정국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지민이 오늘은 안심해도 되는 걸까, 하고 쓸데없는 희망을 가질 때쯤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소리에 지민은 서둘러 피가 맺힌 손을 숨기고 현관으로 향했다.

 

" 손은 왜 숨겨. "

 

지민이 뒤로 숨겨놓은 손을 정국은 억지로 잡아당겨 기어이 엉망이 된 손가락을 확인했다. 잘못했어. 때리지 마. 때리지 마. 정국아. 지민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곧 뺨을 맞게 될 거라는 생각이 지민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리고, 뜻밖에도 정국은 지민을 때리지 않았다. 제가 늦어서 불안했던 거냐고 웃으며 정국은 지민을 끌어안았고,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정국의 품에 안겼다. 지민은 맞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고 있었다.

 

*

 

도망가려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작은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도망가려던 게 아니라고 말하던 지민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정국의 눈을 피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고 정국은 지민을 비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지민의 어깨에 팔을 올린 정국은 잔뜩 굳어서 얼어있는 지민이 귀엽기만 했다.

 

" 어디 가려 그랬어? "

 

" ..? ..."

 

어디가려 그랬냐고 묻잖아. . 제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생각해뒀던 변명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영화보고 싶다며. 영화가 보고 싶은 게 아니었나봐. 나도 사실 이 영화는 별로였는데 우리 그냥 집에나 갈까? 정국이 손끝에 들린 영화표를 흔들며 말했고 지민은 몸을 틀어 정국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영화 볼래. 영화보자. 제발. 예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 가디건 끝자락을 잡은 손도 떨리고 있었고 동그란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정국은 웃었다. 어느새 제 시야에서 사라진 지민을 정국은 영화관 입구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박지민은 이곳에 있을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영화관을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정국은 화를 참아주기로 했다.

 

" 마지막 외출이야. 알아들었어? "

 

마지막, 이라는 수식어에 지민은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가 정국의 표정을 보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뭐라 더 말을 꺼냈다간 정국의 화를 돋우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민은 저를 앞서 보내는 정국을 의식하며 똑바로 걸으려 애썼지만 잠깐 사이에 힘이 풀린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전정국이 저를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잘못했어. 정국아. 잘못했어. 반성할게. 정국아. 정국아. 지민은 제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지민은 묶이고 싶지 않았다. 아플 거야. 아픈 거 싫어. 정국아. 내가 잘못했어. 이미 한 대 맞아서 붉어진 얼굴로 지민은 고개를 저어댔다. 정국은 어차피 곧 제가 힘으로 박지민을 누르고 손목을 묶어놓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비는 꼴이 귀여워서 아주 잠깐 지민을 봐주고 있을 뿐이었다.

 

" 아픈 거 싫다며. 더 맞을 거 아니면 얼른 손 줘."

 

정국아, 정국아. 하고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박지민은 예뻤다. 억지로 손목을 끌어와 묶어버리자 지민은 또 겁에 질려서 몸을 움츠렸다. 딱 생긴 대로 논다고 정국은 지민을 보면서 늘 생각했다. 박지민은 겁이 많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착한건지 멍청한 건지 거절이란 걸 할 줄 몰랐고, 가둬둔 뒤로는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정국은 지민이 귀엽기만 했다. 저를 속일 수 있을 만큼 영악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반항을 해볼 만큼 용감하지도 못했다. 울혈이 가득한 허벅지를 잡아 벌리자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프게 하지 말라고 울먹이는 목소리는 오히려 가학심을 자극했지만 지민이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삽입과 동시에 지민은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아파서 일그러지는 얼굴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정국은 아파하는 지민이 예쁘다고만 생각했다.

 

*

 

울어? 왜 울어. 지민은 제 뺨을 만져주는 손이 무서웠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벽에 기대서, 다가오는 정국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몸을 웅크리는 게 지민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지막 외출이라고 말 해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났어? 정국이 웃었고, 지민은 머리가 하얘졌다. 무슨 배짱으로 나가려 했었는지는 이미 잊혀진지 오래였다.

 

상처투성이인 발에 정국의 시선이 멈춰있는 게 보였다. 지민은 숨을 멈추고 몸을 더 웅크려 제 발을 숨기려 했다. 정국은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제 앞에서 겁을 있는 대로 집어먹고 울고 있는 지민이 예뻐 보일 뿐이었다. 발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건 조금 거슬렸지만 다시 찾지 못 한 것도 아니었고, 지민은 이미 제 잘못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대로 넘어가면 박지민은 또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국은 벌벌 떠는 지민을 일으켰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말을 높이는 박지민도 정국은 역시 귀엽기만 했다. 잘못했다고 매달리는 지민의 발목을 비틀고 나서 정국은 숨도 못 쉬고 우는 지민을 품에 안았다. 제 품에서 헐떡이는 작은 몸을 보면서 정국은 우습게도 지민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잔뜩 부어오른 발목을 누르는 손에 지민은 신음했다. 정국아. 아파. 아파. 그만해. 아파. 소매를 붙잡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정국은 제게 매달리는 지민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미 지쳐 보이는 지민은 아침부터 저를 괴롭히는 정국에게 제발 그만해달라며 울먹이고 있었다. 지민은 제 잘못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국이 저를 몰아붙이는 것도 당연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민은 정국이 망가뜨린 발목이 너무 아팠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정국은 기어이 지민을 울리고 나서야 얼핏 봐도 아파보이는 발목을 손에서 놔주었다. 정국이 저를 놔주자마자 지민은 침대 끝으로 기어가 몸을 웅크리고 작은 손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정국이 제게서 눈을 떼고 방에서 나가고 나서야 지민은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지민은 정국이 무서웠다. 이젠 정국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도 지민에겐 너무 버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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